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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소개

오응정(吳應鼎, 1548∼1597)

  • 담당부서 관리자
  • 등록일 2011-12-01
  • 조회수1800
조선중기의 무신, 충신. 자는 문중(文仲), 호는 완원당(翫元堂), 본관은 해주, 현감 하몽의 아들. 욱, 직, 동량의 아버지. 익산군 용안면 출신, 157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비변랑(備邊郞), 사헌부 감찰, 형조정랑을 거쳐 1579년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에 승진하였다. 1583년 이이(李 珥)를 탄핵함에 있어 반대상소를 올려 동인(東人)들의 미움을 사 흥덕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임지에 나가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8년 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로 다시 관계에 나가 1589년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가 되고, 같은 해에 체찰사 종사관(體察使 從事官), 다시 해남 현감, 벽단첨사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양 대동강의 수탄장(守灘將)이 되어 왜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때 선조께서 평양 파천(播遷)에서 의주로 옮기게 되자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호가했다. 일본과 강화가 성립된 후 강화부사로 부임했고 다시 북변(北邊)의 만포첨사로 국경 수비를 맡았다. 1596년 경기 방어사 겸 수원부사(防禦使 兼 水原府使)로 있던 중 소인의 모함에 의하여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달려가 참전하여 바로 훈련중군(訓練中軍)이 되었고, 이어 순천부사 겸 총병부문안사(順天府使 兼 總兵府問安使) 전라도 우방어사(右防禦使)에 임명되니 순천으로 내려가 전라병사 이복남과 함께 남원성에 들어갔다. 그때 왜적은 5만 6천명의 병력으로 남원성을 맹공격하여 왔으므로 4천의 우리 병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어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큰아들인 어모장군(禦侮將軍) 욱(1571∼1597)과 셋째아들인 비변랑 겸 선전관(備邊郞 兼 宣傳官) 동량(東亮)과 함께 3부자가 화약에 불을 질러 같이 폭사(暴死)하였다. 뒤에 그는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嘉善大夫 漢城府 左尹)에 증직되고 1759년(영조 35)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또한 욱은 호조좌랑에 동량은 선무원종 공신(宣務原從 功臣)등에 봉해졌으며 각각 남원 충렬사(忠烈祠)와 금산(錦山) 충렬사, 용안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응정과 그 장자 욱(稶), 차자 직(稷), 3자 동량(東亮), 직의 장남인 방언(邦彦)을 일반이 삼세 오충(三世五忠)이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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