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구(宋英耉, 1556∼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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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1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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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인수(仁搜), 호는 표옹(瓢翁) 또는 일표(一瓢), 백련거사(白蓮居士), 본관은 진천(鎭川). 왕궁면 출신. 증좌승지 억수(億壽)의 손자. 증이조참판 영(翎)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4년 29세로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무반의 계통인 사과(司果)의 직을 받고, 연이어 부친, 모친, 조모의 상을 치르는 5년 동안은 관직을 떠나 있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鄭 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었고,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일했다. 정언(正言)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어 성절사(聖節使) 홍이상(洪履祥)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다녀온 후 고향에 돌아와 살았다.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에 임명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00년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이어 이조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사간(司諫),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1607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으나 권신 정인홍(正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 사간에 등용되었고, 필선(弼善)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1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616년 병조참판에 올랐고, 1618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정청에 불참하자 그로 인해 파직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절대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차례 파직, 좌천, 휴직되었으나 그것이 관직자의 사표가 되었다. 그가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등과(登科)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던 주지번(朱之蕃)을 알게 되었는데, 송영구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그는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주씨는 사신으로서 조선에 왔었다. 그는 송영구를 늘 스승으로 섬기고 잊지 못하여 조선 내왕 사신을 자원했다고 하며, 조선에 와서 송영구를 찾았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것을 알고 익산 왕궁(王宮)에까지 내려와 상봉하고 돌아갔다. 익산 왕궁에 찾아와 송영구의 망모당액자(望慕堂額字)를 써 주고 가 지금도 액자가 남아 있다. 문집으로 <표옹유고(瓢翁遺稿)> 인쇄본 3권 1책이 있다. 전주 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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