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익산소개

이 귀(李 貴, 1557∼1633)

  • 담당부서 관리자
  • 등록일 2011-12-01
  • 조회수1269
조선후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본관은 연안(延安), 정화의 아들, 이 보의 아우. 일시 익산에 머무어 살았다고 한다. 이 이·성 혼의 문인으로 1582년 생원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에 삼도 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소·말·군졸·콩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이듬해 장성현감·군기시 판관(軍器寺 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고, 1603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백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1609년 함흥 판관을 거쳐 1616년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있을 때 무고를 입고 수감된 해주목사 최 기를 만나본 죄로 이천에 귀양갔다. 그 후 평산 부사(平山府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개탄하고 1623년 김유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여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우참찬(右參贊)·대사헌(大司憲)·좌찬성(左贊成)이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1626년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지내고, 이 해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만 2년으로 주장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이듬해 정묘호란에 왕을 강화도에 호종(扈從)했다. 최명길과 같이 화의(和議)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첨부파일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