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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소개

권근(權近, 1352∼1409)

  • 담당부서 관리자
  • 등록일 2011-12-01
  • 조회수2621
조선초기의 문신,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초명은 진(晋). 본관은 안동(安東).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의 아들. 1368(공민왕17)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375(우왕 1)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1389(창왕 1)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때 부사(副詞)로 명에 다녀왔다. 이 때 가져온 명 예부(禮部)의 글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峰)에 유배되었다가 경주, 흥해, 김해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1390(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다시 청주로 옮겨졌다가 홍수 때문에 풀려 나왔으나 곧 다시 익주 지금의 익산군 팔봉면 임상리 몽관(夢官)으로 유배되었다. 이 곳에는 양촌대(陽村臺)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그는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하였고 조선 개국 후에는 계속 관직에 있었고, 1396(태조 5)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양국관계를 호전시켰다. 1398(태종 7) 정도전일파가 숙청된 뒤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1401년(태조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이후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었다. 그는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에도 밝아 사서오경을 구결을 정했다. 또 그의 입학도설은 후일 이황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여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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